0329 배달부 J
추웠던 지난겨울, 나는 몇 년간 몸 바쳐 일해오던 직장을 잃었다. 젊음과 눈물, 노력, 성취.. 모든 것이 응축되어있던 직장이었다. 미워하기도 했고 좋아하기도 했다. 반반 섞인 그 감정은 애증이었다. 어려워진 회사의 사정으로 인해 희망퇴직 신청을 받는다는 소식이 사내에 퍼졌었다. 다들 그 대상이 자신이 될까 봐 걱정했지만 나는 그중 하나가 아닐 거라 확신했었다.
과장님과 대화에서 감지할 수 있었던 불안한 기운은 확신에 작은 균열을 주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호출된 인사팀과의 면담에서
/쨍그랑/
그 확신은 깨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회사 사정이 안좋다며, 일한 기간이 오래됐으니 신입을 위해 물러나는 게 어떠냐는 제안이었다. 제안의 의미는 두 가지였다. 눈칫밥 먹다가 제 발로 물러날지, 박수받으며 물러날지. 뭐 어쩌겠어. J는 제안을 수락했다. 절벽에서 자의로 떨어지던지, 타의로 떨어지는 것과 같았다. 그렇게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J는 자신의 짐을 챙겨 집으로 향했다. 뜬 구름 잡는 대화는 떨고 싶지 않았다. 내 우울감을 남은 이들에게 배달하고 싶지도 않았기에 회식은 거절했다. J는 두 박스의 짐을 든 채 무작정 걸었다. 맨날 걷던 큰 대로 대신 골목길로 걸었다. 골목길로 걷자 퇴근한 사람들의 수다 소리가 들려왔다. 한참 걷자 내 발자국 소리 외에 고요했다. 발은 앞으로 가고 있지만 비탈길로 내려가는 심정이었다. 우울함이 가미되어 피로가 물밀듯 몰려왔다.
"이제 뭘 하지. 유통기한 없는 열정엔 가림막이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열정이 넘친다고 해서 안될 때도 있구나."
눈물도 울컥했다. 목구멍에서 얇은 떨림이 느껴졌다. 엉엉 울고 싶었다. "엉엉 울면 이 잡음나는 생각들도 다 흩어지려나" 읊조렸다. 터덜터덜 현관으로 들어가니 진이 쭉 빠졌다. 현관문 한켠에 서서 들고 있던 박스를 떨어트렸다.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엉엉 울었다.
몇 달이 지난 후 J는 배달일을 시작했다. 당분간은 버림받았던 직무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저 얼굴에 바람을 쌩쌩 맞으며 자유로이 달리고 싶었다. 음식이 식거나 녹지 않게 빠르게 달려야 되는 이유도 있었다. 전에 자유를 외치며 따두었던 오토바이 면허 덕분에 바로 시작할 수 있었다. 매일매일 J는 음식들을 싣고 달렸다. 짜릿했다. 차와 달리 한순간의 방심으로 사고가 나는 오토바이였다. 항상 고개를 꼿꼿이 쳐들고 등을 자유자재로 구부렸다 피며 달렸다. 바퀴의 노련한 움직임, 귀 옆을 스쳐가는 강한 바람, 아슬아슬한 움직임. 오토바이 위에 있을 때만큼은 모든 걱정도 사라진채 자유로이 달렸다. 행복했다. 30년의 인생을 살아오면서 이런 자유로움은 느껴보지 못했다. 고작 시간이 압박하는 배달 오토바이 안장 위에서 행복감을 느낀다는 게 우습기도 했다. 자유에서 오는 행복감이었던가. 퍼즐처럼 맞춰서 살아가는 것에 벗어난 보상이었던가. 행복은 참 알 수 없는 것이라 했다. J는 행복의 이유를 찾아가지 않기로 했다. 그 후, J는 바람 때문에 흐르는 눈물에도 행복에 겨워 흐르는 눈물으로 치부하기로 했다.